너 하나님의 사람아!
노력보다 먼저 도착한 사랑에 대하여 본문
해 질 녘, 숲길을 걷다 보면 나무들은 서로의 키를 재지 않고 그저 제자리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숲을 벗어난 우리의 일상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저마다 가슴속에 '증명'이라는 무거운 돌덩이를 안고 살아갑니다. 내가 얼마나 쓸모 있는 존재인지, 얼마나 성실히 하루를 견뎌냈는지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확인받아야만 안심이 되는 삶. 현대인이라 불리는 우리는 어쩌면, 멈추면 넘어질까 두려워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고단한 주자들인지도 모릅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우리는 이 습관을 버리지 못합니다. 더 많이 봉사하고, 더 뜨겁게 기도하고, 더 완벽하게 행동해야 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생긴다고 믿는 착각. 그 '진지하지만 불안한' 열심이 오히려 우리의 영혼을 탈진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나요?
잠시 숨을 고르고, 태초의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가정에서 어린아이를 떠올려 보십시오.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얻기 위해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아이는 그저 존재함으로 사랑받습니다. 설거지는 사랑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라나며 자연스럽게 배우는 삶의 태도일 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잊고 지내던 이 근원적인 관계를 다시금 일깨웁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여기서 '아들의 명분'이라 번역된 헬라어 υἱοθεσία(휘오데시아)는 단순한 입양을 넘어, 상속자로서의 완전한 지위를 회복하는 우주적 사건을 의미합니다. '조건 없이 주어지는 선물'은 우리가 무언가를 이루었기 때문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삶의 여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 존재를 감싸 안고 있는 따뜻한 공기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랑받고 있기에 그 길을 걸을 힘을 얻습니다.
이 순서를 뒤바꿀 때, 우리의 신앙은 기쁨이 아닌 고역이 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가만히 묵상해 봅니다. 주님께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이 놀라운 선언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거나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주어졌습니다. 그분은 '사랑받는 자(ἀγαπητός, 아가페토스)'라는 확신을 안고 세상으로 나아가셨지, 세상을 감동시켜 그 사랑을 얻어내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상태'란, 도덕적인 규칙 몇 가지를 어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망각한 상태입니다. 본질에서 벗어난 우리는 자꾸만 두려움을 동력 삼아 움직이려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벌을 받지 않을까?', '이 정도는 해야 복을 받지 않을까?' 그러나 두려움은 우리를 노예처럼 굴종하게 만들 뿐, 자녀로서의 자유를 주지 못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내 안에 거하라"(요 15:4)고 초대하십니다. 여기서 '거하라'는 헬라어 μένω(메노)는 성과를 내기 위해 애쓰라는 말이 아닙니다. 둥지를 틀고 편안히 쉬라는 뜻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열매는 저절로 맺히듯, 우리의 선한 삶은 '삶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 온전히 의탁할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향기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그만 당신의 어깨 위에 얹힌 '증명의 짐'을 내려놓으십시오. 당신은 고용된 일꾼이 아니라,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우리가 매주 나누는 '주의 만찬'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상기시키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는 축제입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에게 지난날의 과오를 묻거나 앞으로의 계획서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끌어안고 입 맞추며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기쁨에 젖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오늘, 당신의 마음 밭에 조용히 깃드는 성령(πνεῦμα, 프뉴마)의 음성에 귀 기울이십시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 기뻐하는 딸이라." 이 따뜻한 음성이 당신의 고단한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대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들됨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걷는 걸음이 바로 삶입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에도, 당신은 아버지의 품 안에 있는 안전한 자녀임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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